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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성지 “순교자의 피, 그리스도인의 씨앗”
김미현 기자  |  kmh@newsc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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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2  08: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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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소문 공원(순교성지)의 현양탑.

[뉴스클릭 김미현 기자] = 16일에는 교황이 한국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미사를 집전한다. 교황은 이날 시복식에 앞서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인 서소문순교성지를 찾아 참배한다.

‘서소문 순교성지’에서는 한국 103위 성인 중 44위,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중 27위(조숙·권천례 동정부부 포함)가 순교했다. 교황은 이곳에서 순교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고 헌화한다.

‘서소문 순교성지’의 역사와 순교 성인들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됐다.

서소문이 광희문(남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할 수 있는 시구문 역할을 했으며, 칠패 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으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

서소문 밖 형장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초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강완숙 골룸바 등이 순교의 고귀한 피를 흘린 때부터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도 바로 이곳에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月落在天水上池盡)”라고 하며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했다.

그 외에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증거터인 순교터가 됐다.

대부분의 서소문 밖 순교자들은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한 것.

   
▲ 공원 옆 약현성당 순교전시관에 순교자들을 재현해 놓은 닥종이 인형.

달레 신부(Claude Dharles Daller; 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모습에 대해 다음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했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앉힌 뒤 턱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했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했고, 10월과 11월에는 ‘백서’ 사건과 관련해 황사영(알렉시오), 현계흠(플로로),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됐다.

이같이 서소문 밖 만초천의 백사장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다.

   
▲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내부 벽에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라고 적혀있다.

이후 기해박해 때,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타)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했다.

8월 15일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이곳에서 참수됐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해 품 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됐지만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엘리사벳)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처형은 설날 대목장을 처형으로 망칠 수 없다는 칠패시장 상인의 하소연으로 당고개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은 남종삼 성인과 전장운 성인 등이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대의 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며,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한양의 천주교도 처형이 잠두봉(지금의 절두산)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순교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앙인들이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가며 하느님을 증언한 거룩한 땅이다.

1984년 5월 6일 시성된 103위의 성인 중 44분이 서소문에서 생명으로 하느님을 증언했으며,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스물다섯 분의 순교자들과 1819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조숙 베드로, 권천례 데레사 동정 순교자 부부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을 위한 과정 가운데 있는 한국 천주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다.

새남터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는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평신도들의 용맹과 신앙의 결단이 찬연히 빛나는 평신도들의 순교터다.

(자료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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